원재훈 - 더 그리워지기 전에

My zone/Poet 2009. 1. 7. 10:17


더 그리워지기 전에


더 그리워지기 전에 창문을 닫는다

눈을 감는다

내 몸속에서 사위어가는 저녁노을

긴 호흡으로 들이마시는 저 붉은 피

손목을 긋자, 죽음의 山이 보인다

능선이 이어지고

계곡이 이어지고 아직은 싱싱한 물줄기같이

손목에서 빠져나오는 저 붉은 피는 저녁노을이었다

점점 기운이 떨어지고

밤이 온다

편안한, 아주 편안한 하루의 죽음이여

미안하게도 너의 이름을 이젠 기억할 수가 없구나

이제 속 같았던 청춘이여

축축이 젖었던 그리움들이여

이젠 그 무수한 잔뿌리들을 걷어들여라


부질없는 말들이 빠져나간다

지킬 수 없었던 약속들이 빠져나간다

만날 수 없었던 나날들이 빠져나간다

내 몸 속에 이렇게 많은 것들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니

한 장의 단풍잎 같았던 사람이여

내 작은 눈동자가 담아놓았던 그대가 나보다 더 큰 나였구나

그랬었구나 그랬었구나 그래서 그랬었구나


더 그리워지기 전에 별빛은 새벽을 부른다

싸늘하게,

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나의 몸, 새벽

창백한 이슬이 떨어지는 곳에서 다시 꽃이 핀다

나에게 되돌아오는 나의 피

아무런 흔적도 없이

저 싸늘한, 무심한 새벽빛에 지워지는 어둠처럼

그렇게, 저렇게 사라져가는구나


슬픔이 눈을 뜨면 무서운 일이 벌어집니다. 한여름

의 나무가 시들어버리고, 수십층의 건물이 무너집니

다.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그대가 사라져 버립니다.

태풍이 눈을 뜨면 지상의 모든 것은 한 순간에 부질없

이 사라집니다. 희망은 절망의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

는 한 장의 나뭇잎입니다. 저 튼튼한 절망의 뿌리에

서 싹을 띄우는 잡초입니다. 여태껏 내가 살아 있다

는 것이 기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대학병원의

중환자실에서 깔딱거리며 연명하고 있는 저 많은 희

망들, 아 지겨운 희망들, 가증스러운 희망들......


더 그리워지기 전에 눈이 내린다

눈이 많이 내린다

눈이 너무 많이 내려 갈 길이 보이지 않으면

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지 않겠지

가지 못하는 길 위에서 서성거리는 것이

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것이 아닐 때

초생달도 아주 따뜻한 온기가 된다

달빛에 몸을 녹이는 나의 영혼이여,

몸을 비운 내 마음의 몸이 가벼워진다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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posted by 망차니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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